대만의 백색테러 시대와 그 그림자
많은 이들이 오늘날 대만을 민주와 자유, 활기찬 시민사회로 떠올린다. 그러나 70여 년 전, 이 섬에는 극한의 두려움과 침묵이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다.
‘백색테러(白色恐怖, White Terror)’—이 용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만을 지배했던 국민당 정부의 정치적 숙청, 공포정치, 그리고 그 속에서 사라진 수많은 사람들을 상징한다.
혼돈의 시대, 국민당의 이주와 권력 독점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대만인들은 오랜 고통의 시대가 끝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곧이어 중국 본토에서 국민당(국민정부)이 쫓겨 대만으로 옮겨오면서, 새로운 시련이 시작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벌어진 국공내전(국민당-공산당)에서 패한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은 1949년, 200만 명이 넘는 군인과 관료, 그 가족들을 이끌고 대만으로 철수했다.
대만의 기존 주민(본성인)과 새로 들어온 국민당 세력(외성인)은 문화적·정치적으로 큰 간극을 보였고, 국민당은 권력 유지를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과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2·28 사건—공포정치의 서막
1947년 2월 28일, 타이베이에서 사소한 사건으로 촉발된 민중 봉기가 전역으로 확산됐다. 국민당 정부는 이를 강경 진압했고, 수만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이후 대만은 계엄령이 선포된 ‘백색테러’ 시대로 진입한다. 계엄령은 무려 38년간(1949~1987) 이어졌고,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령이었다.
“빨간 딱지”의 공포,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
국민당 정부는 공산주의자 색출, 반정부 세력 제거라는 명목 하에, 의심되는 이들을 체포·고문·처형했다.
대만 전역에는 ‘빨간 딱지’가 붙은 사람—즉, 정치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힌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밀경찰에 의해 심야에 연행되었고, 가족조차 그들의 행방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녹도(綠島)’ 등지의 감옥과 재교육 캠프에는 수만 명의 정치범, 지식인, 예술가, 학생, 교사, 심지어는 평범한 시민들이 수감되었다.
가족의 삶을 뒤흔든 숙청
백색테러의 피해는 한 개인을 넘어서 가족 전체, 지역사회 전체에 파문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한 가족의 가장이 “정부 비판”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끌려가면, 남겨진 가족은 “반체제 가족”으로 낙인찍혀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피해자 유족들은 오랜 세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해야 했고, 심지어 아이들조차 가족의 과거를 말하지 못하는 공포 속에 자라났다.
대만 사회에 남은 상처와 기억
백색테러의 시대는 1987년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 이후에야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1995년,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사과했고, 진상조사와 배상 작업이 시작됐다. 지금도 타이베이의 ‘2·28 기념관’, ‘녹도인권기념관’ 등에서는 당시의 실상을 전하는 전시와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가족들은 잃어버린 가족의 유해조차 찾지 못했고, 정치적 트라우마는 대만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깊게 남아 있다.
트라우마를 딛고, 민주주의의 길로
백색테러의 기억은 오늘날 대만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일깨운다.
침묵과 공포의 역사를 딛고, 진실을 외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대만인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된다.
역사는 단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이 잊고 싶었던 과거는, 누군가에게는 오늘도 끝나지 않은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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