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국경을 ‘국가의 당연한 경계’처럼 받아들인다. 하지만 19~20세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국경이란 오늘날처럼 뚜렷한 선이 아니라,
중화(中華)의 천하, 조공 질서, 봉건 영토, 유목민의 초원, 바다, 섬들이 얽힌 유동적 공간이었다.
근대적 국경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떻게 한중일대만의 국가 정체성에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전통 동아시아—경계 없는 세계
조선, 청, 일본, 류큐, 대만, 몽골, 베트남 등은
- 조공·책봉(冊封)·화번(藩) 관계,
- 경계선이 아닌 ‘완충지대’와 관문(관문)
- 이민족, 무역, 외교, 해적, 사절, 혼인 등
다층적이고 느슨한 질서를 유지했다.
“조선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 “중국의 천하는 사방” “일본의 경계는 바다”라는 관념이 주류였고, 영토 분쟁보다는 명분과 질서가 중요했다.
제국주의의 파도—국경선의 탄생
19세기 중후반,
- 서구 열강의 침입, 제국주의 팽창,
- 근대 국제법(서구식 영토권, 조약 등)이 확산되며
동아시아에도 ‘지도에 그을 수 있는 국경선’이 필수가 된다.
주요 국경 사건과 영토 분쟁
- 청일전쟁(1894~95): 조선의 자주권, 만주, 타이완을 둘러싼 청·일 충돌. 시모노세키조약으로 타이완이 일본령, 조선의 독립이 ‘공식’ 선언됨.
- 러일전쟁(1904~05): 만주와 한반도 북부, 사할린·연해주 등 북방 영토 분쟁.
- 조선과 청의 경계 확정: 1885년 간도(間島), 1909년 간도협약 등 한·중 국경선 문제가 본격화.
- 대만의 정체성 변화: 1895년 이후 일본 식민지, 1945년 국공내전 이후 중화민국 정부의 이주, 본성인·외성인 대립.
- 일본의 북방영토, 센카쿠(댜오위다오) 분쟁: 러시아, 중국, 대만, 한국 등과의 해양 및 도서 영유권 경쟁.
국민국가의 탄생과 민족주의
서구의 ‘국민국가(Nation-State)’ 모델이 도입되면서,
- 각국은 **‘우리 땅’과 ‘우리 국민’**을 구분하고,
- 국경 내 인구에 대한 통치, 동화, 교육, 경제 개발을 추진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1910~45) 국권 상실을 경험하며, 독립운동, 임시정부, 분단 등 ‘국민국가’ 형성의 역사가 복잡하게 전개됐다.
중국은 청 말기 변혁, 신해혁명(1911), 군벌 시대,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어지는 국경과 국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만주, 티베트, 신장, 몽골, 타이완 등 다민족·다영토 체제 속에서 영토분쟁과 민족문제는 지금도 계속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 이후 ‘근대국가’로 도약, 영토 확장과 식민지 지배를 통해 국민국가 모델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패전 후 북방영토, 오키나와, 센카쿠 등 주변국과의 영토문제가 남았다.
대만은 식민지와 국민당 이주, 본성인·외성인 대립, 중국과의 ‘국가 정체성’ 논란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국경, 국가, 그리고 기억
국경선이 명확해지면서
- 지리·언어·문화·민족·역사 교육도 ‘국가별’로 강화
- 각국 영토 내 ‘타자(他者)’에 대한 배제, 차별, 동화 정책이 시행
- 난민, 이주, 월경(越境), 민족 분쟁, 소수민족 탄압, 이중국적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등장
국경은 단순한 선이 아니라,
- 국가 정체성의 심장
- 역사 기억의 전장
- 세계질서 변화의 현장이 되었다.
결론—국경 너머의 미래
오늘 동아시아의 영토·국경·정체성 논쟁은
19~20세기 근대 국경선의 탄생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국가의 경계는 때로는 ‘우리를 지키는 담’이자,
‘이웃과 소통을 막는 벽’이기도 하다.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
국경의 역사를 직시하고, 그 이면에 숨겨진 다양성과 기억,
공존의 가치를 되새겨야 할 때다.
'Histo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 위의 거상, 하카타 상인 (2) | 2025.07.29 |
---|---|
잊혀지지 않는 상처 (2) | 2025.07.28 |
두 개의 대만, 하나의 섬 (3) | 2025.07.27 |
식민지 경성, 두 세계가 부딪힌 도시 (1) | 2025.07.27 |
그림자 속의 제국 (2) | 2025.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