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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민주화 운동과 야당 형성 – 1980년대 ‘가오슝 사건’과 민주진보당 창당

리버의역사 2025. 9. 6. 23:37

1980년대 대만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은 ‘가오슝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민주진보당 창당으로 이어지며 대만 다당제 민주정치의 출발점이 되었다.


서론

대만은 1949년 국민당 정부가 이주한 이후 장기간 계엄령 체제가 지속되었다. 정치적 반대파는 탄압되었고, 야당의 결성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접어들며 민주화 요구가 본격화되었고,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가오슝 사건’(Formosa 사건, 1979)**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민주진보당(DPP) 창당으로 이어지며 대만 민주화의 획기적 전환점이 되었다.


가오슝 사건의 배경

계엄령 체제와 정치적 억압

1949년부터 대만은 세계 최장기 계엄령(1949~1987) 하에 있었다.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철저히 제한되었고, 국민당 일당 독재가 지속되었다.

‘당외(黨外)’ 세력의 등장

1970년대 말, 국민당에 반대하면서도 공식적으로 야당을 만들 수 없었던 세력은 ‘당외 세력’이라 불렸다. 이들은 언론지 <메이리다오(美麗島, Formosa)>를 중심으로 민주화와 인권을 주장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가오슝 사건 (1979)

사건 전개

  • 1979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을 맞아 가오슝에서 ‘메이리다오 잡지사’ 주최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언론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했으며, 이는 당시 국민당 체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 그러나 경찰과 충돌이 발생했고, 지도부는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주요 인물

  • 슈신량(許信良), 황신제(黃信介), 여융더(呂秀蓮, 후일 부총통), 천수이볜(陳水扁, 후일 총통) 등이 참여했다.
  • 이들은 이후 대만 민주화 세력의 핵심 지도자가 되었다.

의의

가오슝 사건은 비록 탄압으로 끝났지만, 국민당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균열을 내고 민주화 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촉발했다.


민주진보당(DPP) 창당 (1986)

비공식 창당

1986년 9월, 여전히 계엄령이 해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외 세력은 결집해 **민주진보당(Democratic Progressive Party, DPP)**을 창당했다. 이는 대만 최초의 합법적 야당이었다.

민주화의 가속화

  •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정당 활동이 합법화되었다.
  • DPP는 이후 선거를 통해 점차 지지 기반을 넓혔고, 2000년에는 마침내 국민당 정권을 종식시키며 집권에 성공했다.

대만 민주화 운동의 의미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오슝 사건과 DPP 창당은 대만이 권위주의 체제를 벗어나 다당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분수령이었다.

세대와 정체성의 변화

민주화 운동은 단순한 정치 개혁을 넘어, 대만인의 정체성 형성 과정과도 맞물려 있었다. 이는 이후 ‘대만 본토화’ 정치 흐름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 민주화의 맥락

1980년대 대만의 민주화 운동은 한국의 6월 민주항쟁, 필리핀 피플파워 혁명과 나란히, 동아시아 민주화 물결의 한 부분으로 평가된다.

가오슝 사건과 민진당의 창당


결론

1980년대 대만 민주화 운동은 ‘가오슝 사건’을 기점으로 야당 형성과 정치적 다원주의로 발전했다. 민주진보당 창당은 권위주의 체제를 넘어선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오늘날 대만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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