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섬의 주인에서, 다시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
“대만에는 대만인만 산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대만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뒤섞인 섬이다. 대만의 역사는 한족 이주자나 일본, 중국과의 정치적 역동성만큼이나, 오랜 세월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원주민(原住民, Indigenous Peoples, 타이완어로는 “아타야알”)’들의 이야기로도 풍성하다.
한족 이전, ‘섬의 주인’들이 있었던 대만
한족(漢族)이 대만에 대거 이주해 오기 전, 대만에는 다양한 원주민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파완(Paiwan), 아미(Amis), 타로코(Taroko), 아타야알(Atayal), 루카이(Rukai), 부눈(Bunun) 등, 공식적으로만 16개의 원주민 부족이 현재 대만 정부에 의해 인정받고 있다.
이들은 언어적으로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n)’ 계통에 속하며, 폴리네시아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과도 연관된 것으로 밝혀졌다. 학자들은 대만이 바로 오스트로네시아 인류 대이동의 출발점일 수 있다고 본다.
그들의 전통 문화는 각 부족마다 다채로웠다. 얼굴 문신과 같은 독특한 풍습(아타야알), 선명한 색채의 옷과 비단 장식, 집단 사냥과 농경, 정령 신앙 등이 대표적이다. 부족별로 언어와 신화, 계보를 중요하게 여겼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공동체 중심의 삶을 영위했다.
외부 세력과의 충돌, 그리고 정체성 상실의 시대
17세기 네덜란드, 그리고 그 이후 한족의 대량 이주, 청나라, 일본 제국주의, 국민당 정권 등 외부 세력의 지배와 함께 대만 원주민들은 수많은 시련을 겪었다.
특히 청말-일제 시대, 한족 이주가 본격화되며 원주민들은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 일제 강점기에는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강제 이주, 동화 정책, 전통 문화 억압, 일본식 성명 강요 등 정체성 말살 정책이 이어졌다. 그 후 국민당 시기에는 한족 중심의 국가 정책에 밀려 원주민 언어와 문화, 교육권마저 잃었다.
현대, ‘원주민 정체성’의 재발견
그러나 역사는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1980년대 민주화와 함께 대만 원주민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부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선언하고, 언어·문화 부활 운동을 벌였다.
1994년 대만 정부는 ‘원주민’이라는 공식 명칭을 도입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원주민 언어 교육, 전통 마을 복원, 자치권 신장, 미디어 출연 등으로 그 존재가 점차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오늘날 타이베이나 타이중 등 도시에는 여전히 원주민 출신 이주민이 많고, 지방선거에서도 원주민 출신 정치인들이 등장한다. 젊은 세대들은 팝 음악, 패션, 미디어, 스포츠(야구·육상 등)에서 자신의 뿌리를 당당히 드러내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잃어버린 땅, 다시 찾는 이름
아직까지도 원주민들은 토지권 문제, 경제적 소외, 차별 등 현실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점차 “섬의 진짜 주인”이라는 자긍심과 대만 다문화 사회의 상징적 존재로 주목받고 있다.
원주민들은 단순한 역사 속 소수가 아니다. 대만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당당한 시민이자, 동아시아 해양 문명의 살아있는 증거다.
대만 원주민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는
- 대만 원주민 박물관 공식 웹사이트(영문)
- 타이완 역사박물관(공식)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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