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바다 위의 거상, 하카타 상인

리버의역사 2025. 7. 29. 10:34

일본-중국-조선 삼국을 잇다

오늘날 후쿠오카(福岡)의 중심이자, 규슈의 관문 도시로 알려진 하카타(博多).
그러나 이 도시는 중세에서 에도시대까지, 동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한 상인 네트워크의 심장이었다.
하카타 상인들은 일본, 중국, 조선을 잇는 바다의 교역로를 개척하며, 동아시아 경제·문화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하카타—규슈 해안의 국제도시

하카타는 일본 서부, 규슈 북부에 위치한 천연항으로, 고대부터 대륙과 일본 열도를 잇는 관문이었다.
백제, 신라, 당나라, 송나라, 고려 등과의 무역 창구였고, 몽골 침입(원군의 일본 원정) 때도 군사·물자 공급지였다.
특히 가마쿠라무로마치센고쿠~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하카타는 ‘국제 무역 도시’의 명성을 이어갔다.


하카타 상인—‘다이나믹’한 교역의 선구자

하카타 상인들은 단순한 곡물·생필품 유통상을 넘어,

  • 무로마치시대엔 ‘덴카이이치(天下一) 상인’으로 불릴 정도로 전국의 부를 장악했다.
  • 고려·명·청과의 ‘공인(公認) 교역상’이자, 일본 내 다이묘·무가(武家), 절·신사와도 긴밀하게 협력했다.
  • 동시대 오사카, 사카이, 시모노세키 등과 더불어 ‘무역 도시 연합’의 중추였다.

특히 하카타는 ‘다이후쿠센(大福船)’이라 불리는 대형 상선과, 교토·오사카를 잇는 운하, 전국 각지의 상인망(商人網)을 바탕으로
일본 국내외 최고의 경제력과 정보력을 자랑했다.


한중일 무역의 ‘허브’가 되다

하카타 상인들은 일본 내 생산물(은, 동, 사케, 도자기, 일본종이, 무명, 칼 등)을 중국, 조선, 류큐 등지로 수출하고,

  • 중국(명·청)산 비단, 약재, 도자기, 서적, 차, 조선산 인삼, 면직물, 청자, 서적 등 각종 상품을 수입했다.
  • 특히 명나라 해금 정책 이후에도, ‘공인 사무역’이나 ‘왜구(倭寇) 교섭’ 등 다양한 형태로 대외 교역을 지속했다.

조선과는 ‘통신사(通信使)’, ‘세견선(歲遣船)’ 제도, 부산·제주·통영 등지와의 공식·비공식 무역을 통해
한일 양국의 상품·기술·문화를 활발히 교환했다.

중세 하카타 항구에 정박한 일본·중국·조선 무역선과 하카타 상인의 교역 장면


전쟁, 정변, 혼란 속의 하카타 상인

하카타 상인들은 몽골 침입, 내란(센고쿠 시대), 일본 전국 통일, 임진왜란(1592) 등 수많은 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 무사, 승려, 외국 상인과의 ‘연합’
  • ‘자치도시’적 성격(에도시대까지 독립적 자치권, 무기 소유, 무사와의 결혼 등)
  • 신속한 정보 교환, 해외와의 네트워크
    로 위기를 극복했다.

임진왜란 시기, 하카타는 일본군의 병참 기지이자 조선과의 인적·물적 교류의 중심이었으며, 전후 ‘도자기 기술’ 전파 등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와 문화를 잇다—하카타의 유산

하카타 상인들은 일본 각지에 상점, 창고, 선단을 두고

  • 도시 발전, 인구 이동, 새로운 기술·문화 전파의 중개자
  •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博多祇園山笠) 등 지역 축제와 전통문화의 후원자
  • 불교, 유교, 선진 학문 도입과 사찰·학교 건립 등 지역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

하카타 상인 출신 중 일부는 에도시대 전국 유수의 부호, 막부 공인 상인(오미, 교토, 오사카 상인 등)으로 성장했다.


결론—바다를 건너 세상을 연결한 사람들

하카타 상인들은 일본·중국·조선이 경쟁과 협력, 교류와 대립을 반복하는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바다를 건넌 다리’이자,
경제와 문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오늘날 후쿠오카(하카타)의 국제적 감각과 개방성,
동아시아 문화와 인재의 용광로라는 이미지는
바로 이 하카타 상인들의 오래된 DNA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