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도의 아이누족과 일본화(일본同化) 정책의 그림자
일본 최북단, 광활한 평야와 빙설이 어우러진 섬—홋카이도(北海道). 이곳엔 오래전부터 ‘일본인’이 아닌, ‘아이누(Ainu)’라는 또 다른 주인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아이누는 수천 년 동안 홋카이도와 사할린, 쿠릴 열도의 대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 신앙, 문화를 꽃피워왔다.
아이누족—바다와 숲의 민족
아이누는 언어적, 인류학적으로도 일본 주류인 야마토민족(大和民族)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집단이다. 아이누어는 일본어와도, 유라시아 다른 언어와도 계통이 다르다.
이들은 사냥, 어업, 채집, 소규모 농경에 의존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왔다. 곰신(イヨマンテ), 불의 신, 숲과 바다의 영혼을 모시는 ‘카무이’ 신앙이 대표적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 문신을 새기고, 수공예와 직물, 목조예술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일본화 이전의 홋카이도
아이누는 원래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 여러 마을(코탄)을 이루고 자치적으로 살았다. 일본 열도에서 전해진 벼농사 문화와 달리, 자연 친화적 경제 구조를 유지하며, 동북아시아의 다양한 민족과 교류했다.
에도시대 이전, 일본(마쓰마에번)과 교역이 이뤄졌으나, 주로 동등한 파트너로서의 관계였다.
일본의 ‘개척’과 동화 정책—삶의 변화와 저항
19세기, 메이지유신과 함께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개발’(開拓)을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이 땅을 국가 통제 아래 두기 시작했다. 정부는 아이누 땅을 국유지로 전환하고, 야마토민족 이주자들을 대규모로 정착시켰다.
아이누는 갑자기 ‘천황의 신민’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토지, 사냥터, 전통적인 생활 방식, 언어, 종교, 의례 등 거의 모든 문화적 근거를 잃었다. 아이누어 사용과 전통 의례, 문신까지 금지됐고, 아이누 아이들은 강제로 일본어 학교에 다녀야 했다. 토착민으로서의 자존감은 무너지고, 사회적 차별과 빈곤이 이어졌다.
공식적인 차별, 그리고 저항과 변화
메이지 정부는 1899년 ‘구토인보호법(旧土人保護法)’을 제정, 아이누를 ‘구토인’(옛 땅의 사람)으로 규정하며 형식적 보호와 실제 차별 정책을 병행했다.
아이누의 사유지 소유를 제한하고, 일본식 이름과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그 결과, 20세기 들어 아이누어는 거의 사라지고, 많은 아이누인이 ‘일본인’으로 위장하며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소수 인권운동의 확산, 1990년대 일본 사회의 다문화 인식 고조와 더불어 아이누 민족의 정체성 되찾기 운동이 활발해졌다.
현재의 아이누—다시 불붙는 정체성
2008년, 일본 정부는 처음으로 아이누를 ‘일본의 원주민’으로 공식 인정했다. 2019년에는 ‘아이누 정책 추진법’을 제정, 언어와 문화의 부흥, 경제적 지원, 차별 해소 등을 추진하고 있다.
홋카이도 곳곳에 아이누 박물관, 전통 마을, 언어 교육 시설이 생기고,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아이누 문화의 재발견, 자긍심 회복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다.
아이누계 인구는 공식적으로 1만 명 정도(비공식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 추정)이고, 경제적·사회적 불평등, 차별, 언어 소멸의 위기가 남아 있다.
결론—소리 없이 살아남은 역사, 다시 피어나는 이름
홋카이도의 푸른 바람을 타고, 아이누의 옛 노래와 언어가 다시 깨어나고 있다.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몰렸던 민족, 지금도 완전한 동화와 저항, 자긍심 회복 사이에서 흔들리는 공동체.
일본 현대사에서 아이누의 이야기는,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그리고 역사적 책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아이누족의 오늘은, 동아시아의 다양성과 공존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