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제국, 그 속의 엘리트들
1932년, 일본은 중국 동북부 만주(滿洲) 지역에 괴뢰국 ‘만주국(滿洲國, Manchukuo)’을 세운다.
표면적으로는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가 집권하는 ‘독립국’이었지만, 실상은 일본 관동군이 모든 권력을 쥔 제국주의 실험장이었다.
이 만주국 사회의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조선인과 대만인 엘리트들이, 누군가는 관리로, 누군가는 경찰·경비대로 일본의 질서를 떠받치는 역할을 했다.
만주국 건국—제국의 설계도 위에 지어진 ‘이상국’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만주사기 사건)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이듬해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본이 내세운 명분은 ‘오족협화’(일본·만주족·한족·몽골족·조선족이 평등하게 사는 새로운 국가)였다.
그러나 실상은 일본 관동군이 경제, 치안, 군사, 교육 등 만주의 모든 시스템을 장악했다.
만주의 ‘동양인 이민 국가’—수십만 조선인·대만인의 유입
만주국 건국과 함께 일본 정부는 조선인, 대만인에게 적극적인 이주와 만주국 진출을 권장했다.
- 1930년대
40년대에 약 70만100만 명의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했다. - 대만인도 수만 명 단위로 만주에 이주하거나, 만주국 정부·경찰·회사에 취업했다.
만주는 기근, 가난, 차별에 시달리던 조선·대만인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자, 동시에 척박한 일제 식민지 체제의 ‘또다른 전선’이었다.
관리·경찰·엘리트—‘제국의 톱니바퀴’가 된 조선인·대만인
만주국의 각종 관청, 철도, 학교, 경찰, 경비대 등에는 일본인 고위관료 밑에 조선인·대만인 중간관리층, 하급직원이 다수 포진했다.
- 관리: 조선인·대만인 중 일본 유학파,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만주국의 관청·법원·회사에 채용됐다.
- 경찰: 치안 유지와 반일 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조선인·대만인 경찰과 정보요원이 다수 채용됐다.
- 경비대/군인: 만주국 군과 철도 경비, 경비사령부 등에도 다수의 조선인·대만인이 복무했다.
이들은 ‘일본인의 충직한 조력자’였으나, 한편으로는 같은 조선인·대만인 이주민·노동자·독립운동가를 감시·탄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제국의 변방에서 살아남기—‘협력자’인가, ‘피해자’인가
많은 조선인·대만인 엘리트는 현실적 선택, 출세와 생존의 논리 속에서 만주국의 시스템에 편입됐다.
- 조선인 고위 관료·법조인·경찰 간부들은 일본인과의 혼인, 신분 상승, 경제적 풍요를 추구했다.
- 대만인 역시 만주국 학교·공장·회사에서 활약하며, 때로는 현지인과의 교류, 자기네 커뮤니티 구축, 조용한 저항과 이중생활을 병행했다.
하지만 이들 중 일부는 만주국 내부에서 ‘이중정체성’을 유지하며, 때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가 지원, 혹은 만주국 시스템을 이용해 민족사회 발전에 힘쓰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와의 대립, 그리고 역사적 평가
만주국 내 조선인·대만인 관리와 경찰은 독립운동가, 좌익 세력, 중국인 농민 등과의 대립에서 ‘일제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친일파’, ‘협력자’라는 부정적 평가와 함께, 일부는 새로운 정권에 협조하며 다시 신분 상승을 도모했다.
하지만 현실의 그늘 속에는, 가족의 생존과 미래, 식민지민의 고단한 삶이라는 복잡한 고민과 선택이 숨어 있었다.
만주국 이후—기억의 논쟁과 오늘
1945년 일본 패망 후, 만주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인·대만인 엘리트들은 각자의 고향이나, 남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해방 후에는 ‘친일’ 논쟁과 사회적 차별, 혹은 공로 인정 등 다양한 평가를 받으며 각자의 삶을 이어갔다.
결론—역사의 변방, 그 속의 개인들
만주국에서 조선인·대만인 엘리트의 삶은
‘협력’과 ‘저항’, ‘출세’와 ‘고통’, ‘자기모순’이 얽힌 모순 그 자체였다.
제국의 시스템에 적응하며 생존과 출세를 도모한 이들의 흔적은, 오늘날 동아시아 현대사의 복잡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개인의 선택과 집단의 운명, 그리고 역사적 평가—이 모든 것이 만주국이라는 제국의 변방에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인간 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