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시기 ‘위안부’ 피해 여성, 한국·중국·대만의 기억과 현실
역사는 늘 승자의 기록으로 남는다. 하지만 전쟁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에는 ‘말할 수 없는 패자’의 상처가 깊이 새겨져 있다.
1937년 중일전쟁(이듬해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은 점령지 곳곳에 ‘군 위안소(慰安所)’를 설치하고, 한국·중국·대만 등지의 수십만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했다.
이 피해자들은 전쟁터 한복판에서 폭력과 굴욕,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해방 후에도 오랫동안 침묵과 낙인, 외면 속에 살아야 했다.
한반도의 위안부—국민국가의 상징이 된 고통
한국(조선)에서 동원된 위안부 피해 여성은 최소 수만 명에서 2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 이들은 ‘직업’이나 ‘군수공장 근로자 모집’ 등 명분 아래 가난한 농촌, 도시 하층민, 소녀들까지 조직적으로 유인·납치되었다.
- 군 위안소는 중국 본토, 동남아, 일본 본토, 남태평양 섬 등 전선 곳곳에 설치됐으며, 조선인 여성들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했다.
- 전쟁이 끝난 후에도 가족·사회로부터 외면, 빈곤, 질병, 심리적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공개 증언 이후, 한국 사회는 위안부 문제를 ‘국가적 정의’와 ‘기억 투쟁’의 상징으로 만들어왔다.
피해자 지원, 기록화, 역사교육, 일본 정부에 대한 사죄·배상 요구가 이어졌고, 소녀상 건립, UN 및 국제사회 결의 등 전세계적 연대로 확산되었다.
중국의 위안부—민족적 상처와 집단의 기억
중국 역시 수십만 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발생한 최대 피해국 중 하나다.
- 일본군 점령 지역 곳곳에서 중국인 여성들이 위안소에 강제 동원되었고, 때로는 현지 마을 전체 여성들이 납치당했다.
- 피해 여성 상당수는 전쟁 중 학살, 질병, 기아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 생존자들은 해방 후에도 극심한 빈곤, 신분 차별, 가족과 사회의 냉대에 시달렸다.
1990년대 이후 중국 정부와 민간단체는 대규모 피해 조사, 다큐멘터리 제작, 추모사업에 힘썼으나,
공산당 체제의 특성상 피해 여성의 개별적 삶보다는 ‘반일 민족주의’의 역사적 상징, ‘국가적 피해’로 강조되는 경향이 강하다.
개인 증언의 사회적 확산과 지원 정책은 한국보다 늦었고, 최근에야 중국 내에서도 위안부 증언과 연구, 박물관 등이 확대되고 있다.
대만의 위안부—침묵과 늦은 증언
대만(일제 통치 당시 ‘일본령 대만’)에서도 위안부 동원은 일제강점기 후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 대만인 위안부 여성도 수천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일부는 ‘일본인 군속(軍属)’ 신분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 대만에서는 일본 통치의 ‘근대화’ 이미지, 국민당 정부의 반공/반일 이념, 소수민족·본성인과 외성인 갈등 등 복합적 사정으로
피해자 증언과 사회적 논의가 매우 늦게 시작됐다.
1990년대 이후에서야 일본 및 한국, 국제사회 연대와 함께 대만인 피해자 증언, 연구, 추모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일본과 대만의 ‘특수 관계’(일본에 대한 상대적 친밀감, 대만 내 일부 친일 정서 등)로 인해 사회적 논쟁도 엇갈리고 있다.
피해 이후의 삶—개인과 사회의 거리
세 나라 모두,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침묵과 고립,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 전쟁 후 귀향하더라도 가족과의 재결합은 거의 불가능했고,
- ‘수치심’ ‘불결함’ ‘비정상’ 등 낙인이 따라붙었다.
-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고통이 평생 지속됐으며,
- 정부와 사회의 관심, 지원, 진상규명은 매우 늦게 이루어졌다.
각국의 인식과 운동—차이와 공통점
한국은 피해자 개별 증언, 국가 지원, 시민단체 운동, 국제연대가 매우 활발하다.
‘정의기억연대’ 등 피해자 중심 운동, 위안부 문제의 세계화, 역사교육, 문화적 기억(소녀상, 연극, 영화 등)이 특징적이다.
중국은 ‘국가적 피해’ 강조, 반일 민족주의, 대규모 집단기억이 우세하며, 최근에야 피해 여성 개인의 증언, 지원 운동이 확산 중이다.
대만은 비교적 늦은 사회적 논의, 피해자 증언 확산, 정부의 지원 및 일본과의 미묘한 외교적 입장 등
한국·중국과 또 다른 맥락에서 위안부 기억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결론—한일관계, 동아시아의 미래, 그리고 기억의 힘
위안부 문제는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지금도 동아시아 사회와 국제관계, 여성 인권, 기억과 치유, 정의와 화해에 관한 논쟁이자 숙제다.
아직도 살아계신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은,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들어야 할 역사이고,
잊혀진 이들의 이름과 삶을 복원하는 과정이다.
국가와 사회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정의로운 기억’과 ‘실질적 치유’를 위해,
상처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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