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의 연행과 지식의 국경을 넘은 이야기
조선 후기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전통 유학의 권위가 흔들리고, 사회·경제적 현실은 새로운 돌파구를 요구했다. 바로 이 시기,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지식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실학은 단순히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문제 해결과 사회 개혁을 꿈꾼 조선 지성인들의 사상운동이었다.
청나라, ‘적국’이자 ‘배움의 대상’
조선 사회에 청나라는 복잡한 대상이었다. 명분상으로는 명나라를 섬기고 청을 오랑캐(胡)로 여겼으나, 현실적으로는 거대한 청나라가 동아시아의 질서를 주도하고 있었다. 한편 청은 경제적·과학적·문화적으로 새로운 활기를 보여주고 있었고, 조선의 개방적 사상가들은 “배움”의 관점에서 청나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연행(燕行), 조선 지식인의 ‘세계여행’
“연행사(燕行使)”란 조선에서 중국 청나라의 수도 북경(燕京)에 파견된 공식 사절단이다. 공식적으로는 조공과 외교가 목적이었지만, 실상 연행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지식의 국경’을 넘어서는 결정적 기회였다.
왕복 5,000리 길을 넘는 대장정, 사절단은 북경에서 책을 구하고, 신문물을 목격하며, 청나라의 개혁적 학자들과 깊은 대화를 나눴다.
연암 박지원, 북경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대표적인 연행사이자, 조선 실학의 대명사다. 그는 1780년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을 방문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북경에서 목격한 시장의 번잡함, 청나라의 발전된 농업 기술, 실용적인 사고방식, 외국인과의 교류, 그리고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연암은 청나라 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중화’란 단어가 인종·출신이 아니라 “실질적 문화와 덕행”에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 이 시각은 조선의 보수적 유학자들에게는 충격적이었고, 새로운 실학사상에 거대한 자극을 주었다.
다산 정약용, 경세학(經世學)의 실천을 꿈꾸다
정약용(1762~1836)은 직접 연행을 다녀온 경험은 없지만, 연행사와 실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중국 신지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에서 청나라의 제도와 법률, 과학기술, 농업경영, 토목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선진 사례를 분석하고, 조선 현실에 맞는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서양 기술을 받아들인 청나라의 변화”를 높이 평가하며, 조선도 실용적 학문과 제도 개혁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연행을 통해 전해진 지식의 네트워크
실학자들은 연행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천문학·지리학 등 새로운 지식을 접했다. 청나라는 이미 유럽 선교사들을 받아들여, 세계지도, 천문관측기, 서양식 시계, 의학 등 다양한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유득공 등은 연행을 통해 구한 세계지리서, 지구본, 지도, 서양식 기구들을 조선으로 가져왔다. 이들 지식은 실학파 지식인의 모임인 ‘북학파’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 실학의 유산, 동아시아에 남기다
실학자들의 연행과 지식 교류는 단지 “중국 따라 배우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청나라와 서양 문물을 수용하면서도, 조선 현실에 맞는 개혁적 대안을 고민했다. 신분제, 농업정책, 행정개혁, 과학기술의 보급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천적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오늘날 우리는 실학자들이 ‘글로벌 네트워크’를 통해 배우고 고민하며, 자국의 변화를 이끌었던 선구자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연암, 다산 등 실학자들이 국경을 넘는 ‘지식의 모험’을 감행했던 그 용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닫힌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열린 자세로 배우고, 현실에 맞는 길을 모색했던 그들의 자세.
조선의 실학은 그렇게 한 시대를 뛰어넘어, 동아시아 지성사의 빛나는 유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