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전후, 개화파의 몰락과 외세의 각축
19세기 말, 조선 왕실은 전대미문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내부적으로는 왕권, 왕비, 세도가, 개화파, 보수파가 끊임없이 권력을 두고 싸웠고, 외부로는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거대한 외세가 조선의 운명을 두고 맞붙었다.
이 불안정한 시기는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라는 비극, 그리고 개화파의 몰락과 대한제국 탄생으로 이어진다.
개화파의 부상과 갈등의 심화
개화파는 1880년대 이후 등장한 신진 관료와 젊은 지식인 그룹이다. 이들은 구시대의 벽을 넘고 근대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과 미국, 청나라 등지를 여행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1884년 갑신정변(개화파의 일본 지원 쿠데타) 실패 이후, 많은 이들이 유배, 처형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후에도 개화파와 보수파, 그리고 왕실 내부의 암투는 계속됐다.
명성황후와 왕실 권력 투쟁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민씨)는 초기엔 개화정책을 지지했으나, 점차 보수파와 결탁하며 권력 기반을 넓혔다.
명성황후는 조선 내 청나라 세력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때로 의견 충돌도 겪었고, 왕실 내 민씨 일파와 반민씨 세력, 구황실 세력이 얽히며 정국은 복잡해졌다.
청일전쟁—외세의 각축장이 된 조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도 이에 맞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며, 조선은 청일전쟁의 무대가 되어버린다.
전쟁의 승자는 일본.
청나라는 조선에서 철수하고, 조선은 완전히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된다.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피의 새벽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공사관과 일본군, 친일파 군인들은 경복궁을 습격한다.
일본인 낭인과 한국인 군인들은 명성황후를 찾아 처참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 사건은 조선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며 친러·친미 외교로 선회한다.
개화파의 몰락—쿠데타와 반동
명성황후 시해 후, 일본은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을 장악하려 했으나, 조선 내 반일 감정과 국왕·보수파의 저항도 커졌다.
개화파 내부는 친일, 친청, 친러 등 각파로 분열되었고, 쿠데타, 암살, 테러, 숙청이 반복됐다.
을미사변 직후 단행된 을미개혁(신분제 폐지, 단발령, 양력 도입 등)은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보수파의 저항 속에 실패로 돌아간다.
많은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반민족적 비난을 받고, 일제 강점기엔 독립운동가와도 척을 지게 된다.
조선 왕실의 몰락과 대한제국의 탄생
명성황후 시해는 조선 왕실과 민족 전체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다.
고종은 러시아 등 열강과의 외교를 시도했으나, 국권은 점점 더 약화된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이미 국가의 실질적 주권은 일본 등 외세에 크게 의존하는 신세였다.
결론—피와 그림자, 그리고 근대의 문턱
청일전쟁 전후의 조선은 내부의 분열과 외부의 침탈이 동시에 일어난 격동기였다.
왕실의 암투, 개화파의 이상과 몰락, 명성황후의 비극, 외세의 각축—all 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조선은 결국 일제 강점기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는 오늘날 한국 현대사에서도 여전히 논쟁적이고, ‘근대화란 무엇인가, 누가 주체였는가’를 끊임없이 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