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바다 위 작은 왕국, 동아시아를 잇다

리버의역사 2025. 7. 25. 22:44

류큐왕국과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 오키나와

오키나와라 하면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해변, 일본 최남단의 남국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오키나와는 과거 수백 년 동안 동아시아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지이자, 독립된 왕국 ‘류큐왕국(琉球王国)’의 땅이었다.
이 작은 섬나라가 어떻게 중국, 일본, 조선, 대만을 잇는 무역의 교차로가 되었을까?

 

류큐왕국의 탄생과 성장

류큐왕국은 15세기 초, 오키나와를 비롯한 주변 섬들이 통일되며 시작됐다. ‘쇼하시(尚巴志)’ 왕이 중산·북산·남산 등 세 왕국을 통합하고 슈리(首里)에 왕국을 세우면서 류큐왕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류큐는 지리적으로 동중국해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고, 중국·일본·조선·대만·동남아를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였다.

 

해상 무역왕국, 류큐의 황금기

15세기부터 16세기까지, 류큐왕국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해상 무역 국가 중 하나였다. 류큐 선단은 중국의 절강·복건, 일본의 사쓰마, 조선의 부산, 대만, 동남아시아의 말라카까지 자유롭게 오갔다.
류큐는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조공무역(朝貢貿易, Tribute Trade) 시스템의 일원이 되었다. 명나라 황제는 류큐왕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류큐는 대가로 값진 중국산 비단, 도자기, 책, 동전을 받았다.

하지만 이 무역은 단순히 ‘중국→류큐’로 끝나지 않았다. 류큐는 중국에서 받은 상품을 일본과 조선, 동남아에 재수출하면서 중계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조선의 인삼, 일본의 은, 동남아의 향신료와 무명, 중국의 도자기가 류큐를 거쳐 바다를 건넜다.

슈리성 각국 사절 예배 모습

 

중국과의 책봉, 일본과의 내면적 긴장

류큐는 명나라·청나라와 깊은 외교 관계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동아시아 해상질서의 충실한 구성원”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17세기 초, 일본(에도 막부)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류큐의 운명도 바뀌기 시작한다. 1609년, 규슈의 사쓰마번(薩摩藩)은 군대를 보내 류큐를 무력 점령했다.
이후 류큐왕국은 명목상 독립을 유지했으나, 실제로는 중국(명·청)과 일본(에도 막부) 모두에 조공을 바치는 ‘이중조공’ 체제가 되었다. 겉으로는 중국의 책봉체제에 속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일본 사쓰마의 간섭과 통제를 받았다.

 

조선·대만과의 교류

조선과 류큐의 관계도 흥미롭다. 조선은 류큐를 하나의 독립된 ‘이국(異國)’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했다. 조선의 사신들은 슈리성(首里城)에서 류큐왕을 알현하고, 양국 간 외교와 문물 교류, 무역을 이어갔다.
특히 조선의 의약, 농업 기술, 서적, 그리고 인삼 등은 류큐에서 귀하게 여겨졌고, 반대로 류큐의 진귀한 바닷물고기, 산호, 동남아 물산 등도 조선에 들어왔다.

대만과의 관계 역시 자연스러웠다. 당시 대만은 중국계 이주민, 대만 원주민, 네덜란드 등 다양한 세력이 공존했으나, 류큐 선박은 자유롭게 대만 해협을 오가며 물산과 문물을 교류했다. 이때의 교류 흔적은 대만 남부, 류큐, 오키나와 민속과 음식, 언어 등에 남아 있다.

 

동서양이 만나는 해상 실크로드

16세기 이후, 류큐를 통한 동아시아와 서양의 접점도 생긴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등 서양 상인들이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류큐는 또 한 번 국제 무역의 허브 역할을 했다.
류큐의 선박과 상인들은 여러 나라 언어와 문화에 익숙했고, 각국의 물품을 혼합해 유통시키는 ‘복합 문화상’의 중계상이 되었다.

 

쇠락과 일본 편입, 그리고 남겨진 유산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일본은 류큐왕국을 강제 병합하고 오키나와현(沖縄県)으로 편입한다(1879년).
류큐왕국의 독립은 끝났으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여전히 “류큐인”이라는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언어, 음식, 춤, 음악, 그리고 개방적인 해상 문화는 동아시아 교역왕국의 유산이다.

 

결론—바다가 이끈 혼종의 역사

류큐왕국은 동아시아 대륙과 해양, 중국과 일본, 조선과 대만, 그리고 세계가 만나는 ‘교차로’였다. 강대국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바다를 가르며, 자신만의 생존 전략과 문화를 꽃피웠던 해상왕국의 역사는 오늘날 오키나와의 삶과 문화, 그리고 동아시아의 연결성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