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에도시대의 창, 나가사키

리버의역사 2025. 7. 25. 21:39

데지마를 통해 흐른 동서양의 만남과 작은 국제도시의 삶

오늘날 일본의 서쪽 끝, 규슈 나가사키. 이곳은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일본이 ‘쇄국(鎖国)’이라는 두터운 벽을 친 시절에도 유일하게 세계와 소통하던 창(窓)이었다. 나가사키는 단순한 항구가 아니라, 동아시아와 서양, 그리고 일본 내 다양한 계층이 모여 살아 숨 쉬던 국제무역항이었다.
그 중심에는 조그만 인공섬—데지마(出島)가 있었다.

 

왜 일본은 문을 닫았는가? 그리고 왜 나가사키였는가?

에도 막부는 1630년대, 기독교 포교와 외세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쇄국 정책을 단행한다. 전국의 항구가 봉쇄되고, 외국과의 공식 교류는 나가사키로 한정됐다. 나가사키는 지리적으로 대륙과 가깝고, 일찍부터 중국·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던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만 외국인 상인의 거주와 교역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일본은 자신들의 질서와 문화는 지키면서도, 선진 지식과 무역 이익은 놓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나가사키항 국제 교역 모습

데지마—인공섬에 갇힌 세계

데지마는 1636년 포르투갈인을 격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이다. 포르투갈인들이 추방된 후, 1641년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상관(商館)이 이곳을 사용했다.
네덜란드는 에도 막부가 유일하게 허락한 서양 국가였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종교적 포교에 관심이 없고, 오직 무역만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 상인, 통역사, 일본 관리, 하역 인부 등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작은 국제사회가 형성되었다.

 

데지마의 다양한 공동체—중국인, 조선인, 그리고 일본인

네덜란드인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가사키에는 대규모 중국인 마을(唐人屋敷)이 존재했다. 중국인들은 비단, 도자기, 약재, 책 등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며, 조선통신사와의 교류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는 정기적으로 ‘통신사’가 파견되어 일본과 외교·문화 교류를 이어갔다. 조선통신사는 데지마에 머물면서, 일본과 조선, 그리고 네덜란드·중국인의 만남을 주선하거나 서양 문물을 접하기도 했다.
통역사(通詞)라는 새로운 전문직도 등장했다. 이들은 일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 조선어를 넘나들며 각국의 문물을 번역·중개했다.

 

데지마가 일본에 가져온 변화

데지마를 통해 일본에는 네덜란드의 의학, 천문학, 화학, 지도, 세계사 등 서양 지식(‘란학蘭學’)이 유입됐다.
대표적으로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등 일본인 의사들은 네덜란드 해부학서를 번역하며 서양의학을 받아들였다. 서양식 시계, 유리, 건축기술, 회화 등도 데지마를 통해 일본 전역에 전파됐다.
중국 상인들로부터는 각종 고서, 한약재, 실크, 도자기, 차 등이 들어왔고, 조선통신사를 통해서는 동아시아 유교적 학문, 예술, 문물 교류가 지속됐다.

 

인종과 계급, 그리고 도시의 풍경

데지마와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각국 상인, 통역, 관리, 하인, 인부가 섞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했다. 혼혈아(‘하프란도’), 서양식 학교, 국제적 유흥가 등도 등장했다.
도시 풍경 또한 이색적이었다. 교회와 절, 중국식 회관, 네덜란드풍 건축물이 어우러졌다. 일본인들은 데지마를 관광 명소로 여기며, 구경을 오기도 했다.

 

쇄국과 개항 사이, 데지마의 의의

나가사키 데지마는 일본이 세상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창을 열어 신지식과 문화, 경제적 이익을 유입시키려 했던 “관리된 개방”의 현장이었다.
이 작은 인공섬과 그 주변에서, 일본은 서양과 동아시아 문명의 교차로 역할을 하며 근대화의 토대를 쌓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개항과 함께 데지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 기억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결론—국경을 넘은 만남의 공간

데지마와 나가사키의 국제공동체는 단순한 상업의 장이 아니었다. 각국의 사람들이 언어와 문화를 넘나들며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는 보다 다채롭고 유연한 문명으로 변모했다.
오늘날 나가사키를 걷다 보면, 이 작은 항구도시가 동서양 문명의 ‘만남의 현장’이었음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의 일본, 더 나아가 동아시아가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에 여전히 큰 시사점을 준다.

 


참고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