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조선에 부는 ‘서학’의 바람

리버의역사 2025. 7. 26. 11:17

가장 먼저 가톨릭을 받아들인 나라, 그리고 피의 박해

한국에서 ‘종교의 자유’는 오늘날 자명해 보이지만, 이 땅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일은 한때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조선 후기, 서양에서 온 새로운 학문과 종교, ‘서학(西學, Catholicism)’이 조선 지식인과 백성들에게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작은 씨앗은 곧 거대한 박해와 순교의 역사로 이어진다.

 

서학, 조선을 만나다

18세기 후반, 조선은 오랜 성리학 질서와 봉건적 신분제가 지배하던 나라였다. 그러나 청나라와의 연행(燕行) 등을 통해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문물이 유입되었고, 그 중심에 ‘천주학’(Catholicism, 가톨릭)이 있었다.
조선의 최초 가톨릭 수용은 독특했다. 서양 선교사가 본격적으로 전도하기 전에, 조선의 유학자들이 스스로 ‘천주실의(天主實義, 천주에 대한 진리)’ 같은 서학 서적을 연구하고, 이를 통해 가톨릭 교리를 이해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면서 조선 가톨릭은 자생적으로 싹텄다. 그 후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 이벽, 권일신 등 실학자·사대부 지식인 집단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됐다.

 

“천주를 믿는 것은 죄인가?”—새로운 사상의 충격

가톨릭은 유일신 사상, 인간 평등, 내세관, 형제애 등 유교적 질서와 충돌하는 핵심 가치를 지녔다.

  • 왕보다 하느님을 높이는 신앙
  • 조상에게 제사드리지 않는 교리(‘제사 금지’)
  • 남녀·상하·신분의 구별을 뛰어넘는 평등관
    이 모든 것이 조선 체제엔 근본적 위협이었다.

초기에는 지식인들과 서민들이 조심스럽게 신앙을 나눴지만, 점차 평민, 노비, 여성, 심지어 왕족까지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19세기 초 조선의 가톨릭 신자는 수만 명에 달했다. 당시 동아시아 어느 나라보다도 빠른 전파였다.

 

박해의 서막—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새로운 종교에 대한 조정과 양반층의 불안감은 곧 피비린내 나는 박해로 이어졌다.

  • 신해박해(1791): 진산사건(권상연·윤지충이 조상 제사를 거부해 처형됨)이 계기가 되어 최초의 순교자가 나온다.
  • 신유박해(1801): 정조 사후, 천주교 박멸령이 내려지고, 정약종·이승훈 등 핵심 신도와 실학자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된다.
  •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 조선 말기로 갈수록 박해는 더욱 거세져, 수천~수만 명의 신자가 목숨을 잃는다.
    특히 병인박해 때는 프랑스 선교사 9명과 한국인 신자 수천 명이 순교하며, 이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병인양요)까지 연결된다.

조선 후기 가톨릭 박해 속 비밀 기도 장면

 

숨어서 지킨 신앙—암흑 속의 공동체

조선의 가톨릭 신자들은 산골·오지로 피신해, 숨죽여 신앙을 지켰다. 밤에는 몰래 미사와 성경공부, 세례를 이어가며, 순교자들의 피로 교회의 뿌리를 내렸다.
모진 박해 속에서도 공동체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의 순수성, 용서와 사랑, 희생정신이 더 넓게 퍼졌다.

 

세계가 주목한 순교와 한국 천주교의 유산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평신도’가 스스로 교회를 세운 나라다.
103위 성인, 124위 시복 순교자 등 교황청 공인 성인·순교자의 수에서도 세계적으로 드물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서울 시복식,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등 한국 가톨릭의 순교정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

 

오늘, 그 유산은 어떻게 살아있나

한국의 가톨릭은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사회적 약자 보호 등에도 깊이 관여하며, 순교자정신을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다.
서울, 전주, 공주, 해미 등 전국 곳곳에 순교지와 성지가 보전되어 있고, 매년 수많은 신자와 관광객이 그 자취를 찾는다.

 

결론—피와 눈물, 그리고 사랑의 씨앗

조선 후기, 서학의 전래는 단순한 종교 수입이 아니라, ‘나와 세계, 전통과 새로움, 억압과 자유’ 사이의 치열한 충돌이었다.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신앙을 지켰다.
이 피와 눈물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종교·사상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존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